창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막힐까봐 입석을 구했다.

10시 반에 출발하여 4시 반에 도착하는 무궁화호 차 안에서 내가 자리를 잡은 곳은 화장실과 세면대가 있는 객차간 통로였다.
몇 역을 지나니 정말 무섭게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차기 시작했다.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민족의 대이동 때, 그들은 도대체 어디를 다녀오는 걸까), 무거운 짐 잔뜩 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들, 양복입은 젊은이들..

한 시간 쯤 서서 가는 동안은  문가에 기대어 창밖을 바라보며 귓가를 두들기는 라틴 비트와 열차의 흔들림을 즐겼다. 카메라로 창 밖의 초봄 전경을 동영상으로 찍는 여유까지 부렸다.

그러나

머지않아 통로 안에는 필리핀어로 추정되는 '꼴락깔락~'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아무데나 손바닥 만한 틈만 나도 털썩 앉아 서있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화장실을 이용한 누군가가 지독한 그것을 배출해놓곤 물을 제대로 안내렸는지,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그 냄새는 외국인들과 어르신들의 익숙하지 않은 강한 체취와 뒤섞여 폐부에 스며들었다.
슬슬 짜증이 날 무렵 담배와 라이터를 만지작 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날 긴장하게 한 무서운 포스를 풍기는 아저씨가 신발을 벗고 내 발을 깔고 앉아  폐쇄공간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승무원에게 한 차례 혼났지만 아저씨는 이후에도 계속 왔다갔다 하면서 틈을 살폈고, 나는 아저씨가 나타날 때마다 바짝 경직되었다.
세면대에서 구역질을 할 때쯤 난 더 이상 이어폰을 꽂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너무나 무료했던 것일까, 대략 두 시간 동안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짤짤이를 하였다.
그러니까 나는 소설에서나 보던, 최빈곤층이 주로 이용한다는 3등칸 체험을 한 셈이었다.

다리의 통증이 극에 달할 무렵, 이 모든 상황이 짜증스러웠다. 내 나라에 와서 안그래도 좁은 땅, 더 비좁게 만드는 외국인들이 미워졌다. 도대체 교양교육을 받지 못한 것 같은 촌부들이 경멸스러워졌다.

한참 이토록 못된 생각을 하다가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겠다는 나의 삶의 목표를 생각하였다.
그간 나의 '봉사활동'은 주로 모든 것이 다 세팅된 상황 속에서 살짝 기분좋을 정도로만 희생하고, 칭찬은 와방 받는 것들은 아니었을까.
노숙자 사역하시는 김범석 전도사님이 '왜 나를 이런 일로 부르셨어요' 하고 울며 하나님을 원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오 완전 멋지다'라는 철없는 생각밖에 할 수 없었던 나를 반성하였다. 그리고 그 분을 생각하였다.

시공을 초월하며 살던 하나님의 아들은
무거운 인간의 몸을 입고 답답한 시간의 틀속에 들어오셔서
당시 사람들이 최악의 죄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을 품어주셨다.


돌아오는 길, 멀미가 나서 버스 중간에 내려 터덜터덜 세 정거장을 걸어오며 생각했다.  


응, 정말 자신없어. 난 도무지 약자와 가난한 자를 사랑할 수가 없어.
그 분이 힘을 주시지 않으면
정말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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