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뻐서 엄마 주려고 갖고 왔어요.
사르르 녹아드는 기쁨

주문한 옷 택배가 왔다. 상준이 왈, "얼마나 예쁜지 보게 한 번 입어봐요."

녀석들 자면 꺼내려했건만, 상준이의 기대어린 눈빛에 꺼내어 입었다. 아랫단으로 갈수록 퍼지는 복숭아색 새틴 스커트. 지켜보던 상경이가 "민어곤주(인어공주) 같아요." 새 옷 입고 설레어서 빙글빙글 도니 흐뭇하게 바라보는 녀석들. 이 닦고 와서보니 엄마가 민어곤주 옷을 벗었다고, 울며 다시 입으라고 하는 경이. 

이렇게 오늘도 공주대접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아빠가 엄마를 예뻐해주니 보고 배우는구나. 좋은 남편으로 자라거라. ㅎㅎ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나라며 고집했던 날들이 있었지. 아이들이 자고 난 밤 시간이 이토록 소중한 지 몰랐을 때 말이야.



공동육아 수업을 하다보면 녀석들의 총천연원색의 개성들이 너무나 도드라져서 힘들.. 경이로울 때가 있다. 누구도 개성을 발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그냥 가만히 있어도 아우라가 다들 장난이 아니다. 각각의 향기를 잃게 하는 두려움과 허영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는게, 너를 참된 너로 살게 하는게 육아의 목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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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범죄자 정보가 우편으로 배달될 때마다 유심히 보고 이내 우울해진다. 당신도 엄마 품에서 배냇웃음을 지은 적이 있었겠지. 세상이 당신에게 미소짓는 것 같은 따스함을 느낀 적이 있었겠지. 

언제, 왜였을까, 길을 잃은 건.

안드레아 와이스의 책, '파리는 여자였다'를 읽고 있다. 여전히 바람둥이, 술꾼 마초남성들이 주류인 예술계에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는 멋지게 묘사되지만) 연대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당시 파리는 '여자는 그저 조신하게 살림하고 애 낳고 예쁘게 꾸미고 남편을 내조해야 한다'라는 당위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었기에 여자 예술가들은 레즈비언이건, 보수 기독교인이건 모여서 연대하고 함께 살아갔다.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은 자기 집을 예술가들에게 열어주었고, 그곳에서 문화가 꽃피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거트루드 스타인


 

그러나 그녀의 다소 전위적은 글들은 출판사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58세가 되어서야 건너간 고국 미국에서 드디어 대박이 터졌다. 그것도 자기가 순수하게 쓴 글이 아닌, 비서이자 동반자 앨리스 토클라스의 평이하게 풀어낸 문체의 자서전에서. 천재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전쟁과 정치에 대해 무지하고, 사치스럽게 살았다는 비판도 있다. 미국에서 성공했을 땐 파리의 오랜 동료들로부터 비판과 질투어린 배신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어쨌거나 찬란했고 행복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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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이웃과 함께 부비대며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큰 도전이다. 특히 오늘 내가 한 말이 잘못한 건 아닐까, 저 사람은 왜 내게 저런 말을 할까 종일 생각하는 내향형 소심인에겐. 그렇지만 40대를 앞두고 더 이상 움츠러들어 살 수는 없다. 함께 살아가며 나와 이웃의 삶이라는 선물을 꽃 피워야 한다. 더 이상 빛에 따라오는 그림자를 두려워해서는 안돼. 나를 다독이며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되새겨본다. 



"토끼는 경찰보단 당근 농사가 딱이야"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차단속요원이라니!"


걱정과 잔소리 또한 어찌 사랑의 한 모습이 아니겠냐마는, 근원적으로는 사랑보다 두려움에 더 가깝다.  아이는 끽해야 부모를 안심시키러 거짓말이나 늘어놓겠지. 

신뢰와 격려. 그리고 조용한 기다림으로 너희를 받쳐줄게. 훨훨 날아오르렴.  

하원길, 맞잡은 너의 손이 제법 두툼하다. 내 쬐끄만 손을 넘어서는 영광의 그 날이 날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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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놈은 지난 밤 두 번의 구토와 열댓번의 설사를 했다. 종일 뭣만 먹으면 토해대더니, 저녁엔 할머니가 끓여준 쌀 죽을 먹고 토하지 않았다. 옆에서 구운 계란을 우적우적 먹어대는 형아를 원망스런 눈초리로 바라보며 내내 징징 운 것 빼고는 꽤나 큰 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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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두 녀석의 목숨을 부지시켰다. 이 얼마나 영광된 날인가! 나여. 잘하였도다. 토닥토닥

김영하씨 책을 읽다가 생각. '내면이 있는 아이'로 키우면 되겠구나. 종이 한장, 연필 한 자루만 있어도 재미있게 보낼 수 있는, 외로움과 친구 먹는 아이로.

그렇지만 현실은, 오늘도 근근히 목숨 붙여놓은거. 그래도 잘했어, 배우리. 목숨 붙여놓은게 어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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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내면이 있는 사람과는 짧은 시간을 보내도 동기부여+힐링이 있었다. 부족한 인간관계를 억지로 돈독히 한답시고 앞에 사람 앉혀놓고 본격적으로 통화를 하고 종일 소모적으로 카톡하는 사람이랑 굳이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 어린시절의 의리랍시고 애써 일방적으로 지켜왔던 관계도 보내주자.

야당도 빌빌대서 냉소만 자아내는 요즘, '여혐을 혐오'하는 메갈리아에 주목하고 있다. 여성을 성적대상화 하거나 비하, 혐오하는 내용을 미러링해서 입장을 바꿔보게 만들고, 호탕하게 조롱한다. 요즘 가장 큰 각성의 원천이다. 


후회되는 삶의 지점들을 되짚어보면, '내가 왜 그런 행동을 서슴지 않았지?'가 아니라 '왜 화내지 않고 왜 가만히 있었지?' 싶은 게 많다. 


요전 첫직장의 기관장으로부터 받은 성희롱을 페북에 나눴을 때, 몇몇 입똑똑한 남성들이 '그럼 왜 그걸 놔뒀니?'하는 뉘앙스를 비췄다. 정말 속상했는데, 생각해보면 그건 어릴적부터 학습된, 노예교육 때문이었다. 그 사람부터 얻을 게 하나도 없는데도, '나긋나긋, 넌 여자니까 더 참아야 해. 웃어 넘겨'라는 세뇌메세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어디 성희롱 뿐이던가. 학교, 교회, 직장, 길거리며 대중교통에서도 만나는 각종 마초, 꼰대 또라이짓에도 그러려니 침묵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치욕스러워 참을 수가 없다. 


남들이 만들어준 코르셋에 맞춰 산 햇수가 적지 않다. 그런 내게, 아마존 여전사처럼 빛나는, 생각하고, 설치고, 떠드는 '보지대장부'라 자처하는 여인들이 이 헬세상을 뒤집어주면 좋겠다. 차별없는 세상에서 내 아들들도 더욱 행복할 것임을 확신한다. 


물을 쏟고 눈치를 보는 아이를 보며 가슴아픔과 동시에 쏟아져나오는 모진 말, "엄마가 의자에 앉아서 다 먹고 일어나라했지!"

울어서 한번 더 혼난 아이의 '미안해요' 소리가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좋은 엄마는 결국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데, 나로서는 절망적인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저 하루하루 먹여 살리는거나 근근히 하고 있다. 잘 살려놓으면 언젠가 좋은 아빠의 기운을 받아, 네 안의 좋은 에너지로 날아오르겠지. 애들한테 짜증이나 안부리게 일찍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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