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딸 둘인 집에 장녀로 태어났다. 오빠도 남동생도 없어서 집안에서 성차별이란 걸 모르고 자랐다. 딸이니까 집안일도 할 줄 알아야지, 이런 것 없이 집안일은 당연히 엄마가 하는 것이고, 내 할 일은 공부라고 생각하고 자랐다. 요즘 밥 한번 안 해보고 결혼하는 여자가 많다고 한탄하는데, 요즘은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다. 나도 그렇게 자랐다. 또 나는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모태신앙으로 30년을 교회중심으로 자랐다. 중고등부 시절까지만 해도 남자 동기가 회장을 하고, 여자인 내가 부회장을 하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던 시절이다. 총회 때 의견발표를 할 때면 교회에서 오빠들이 “여자는 잠잠하라”라고 장난칠 때 욱하면서 맞선적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 후 기독교 대학에 진학하고, 졸업 후 청어람아카데미에서 3년간 간사로 일했다. 지난 30년을 교회 언저리에서 자란 셈이다. 기독교대학을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내가 ‘기독교인이고 여성’이라는 자각을 하거나, ‘교회와 여성’이라는 화두에 크게 문제의식이 없었다. 그런데 청어람에서 일하면서, 그리고 교회 내부와 복음주의권이라는 동네를 비교적 가까이에서 살펴보면서 교회 안에 남성중심성/편향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느 회의나 모임에 가도 모두 까만 양복을 입은 남자 어른뿐이고, 여성리더십의 모델을 찾기도 힘들었다. 놀이 프로그램을 봐도 남성은 축구, 여성은 응원/수다 등의 기획이 실망스러웠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간사가 아닌 비서로 불릴 때, 기획과 실무의 이분법 사이에서 허우적댈 때 교회에서 여성간사로서의 나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왜 사회에서 여성리더십은 점점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백번 양보해서 성차별이란 장벽은 거의 제거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교회는 왜 그대로 머물러 있는걸까’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 고민을 할 때쯤 기윤실에서 윤나래 간사님을 중심으로 “교회와 여성”이라는 성경공부에 참여하게 되었다. 여성학과 전공자들, 신학생들, 그리고 기독NGO에서 일하는 간사 몇 명이 모여서 성경을 여성의 시각에서 다시 보면서 새롭게 해석해내는 공부를 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강남순 교수님의 “페미니즘과 기독교”라는 책을 가지고 스터디를 했다. 이 책을 읽고, 스터디를 하면서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의문점이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토론시간에 질문을 던지면 여성학과 선배들이 설명을 해주는데,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그 언어가 너무 부러웠다. 나도 저 언어를 갖고 싶었고, 나의 사랑이자 고민인 교회에서의 젠더문제에 대해 해결은 못하더라도, 해석이라도 할 수 있으면 더 이상 답답하지 않게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성학과에 진학했고, 3년이 지난 뒤 여성주의와 교회에 관해 논문을 쓰고, 올해 2월 졸업을 했다. 여성주의와 교회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맡은 4강에서 더 자세히 할 예정이다.
2. 나에게 여성학이란?
여성학은 여성을 중심에 두고, 여성의 경험과 입장을 연구의 대상으로 하며, 여성이 연구의 주체가 되는 학문이다(Alway, 1995: 215, 이재경, 2007에서 재인용). 그러나 여성학은 단순히 여성에 ‘대한’ 연구에 국한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경험을 중심에 두고, 여성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연구로 학문적 관심을 확장한다.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들었다. 세상을 바라볼 때 여러 가지 시각으로 볼 수 있겠지만, 나는 ‘성별’이라는 축을 가지고 인간을 바라볼 때 이전과는 굉장히 다른 결과가 나오고, 그것은 단지 여성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많은 진실을 알려준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탐구의 주제가 인간이 되는 만큼 다양하고, 깊이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예를 들어 내가 화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나의 학문분야이지, 나의 삶과는 그리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여성학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여성학은 여성들의 경험을 중심에 두고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나의 삶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여성학은 나의 삶, 곧 여성의 삶이 바로 텍스트이고, 거기에서부터 이론이 시작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여성주의는 새로운 렌즈를 눈에 넣은 것과 마찬가지다. 여성주의라는 렌즈를 넣었을 때 그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예를 들어서, 왜 여성은 남성보다 취업하기 어려운가? 왜 정치인이나 기업의 CEO는 주로 남성인가? 왜 양육이나 가사는 사회적으로 평가받지 못하는가? 왜 여성들은 남성보다 연애에 몰입하는 정도가 높은가? 등등. 여성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여성주의라는 렌즈를 눈에 넣기 전에는, 이와 같은 현상을 불가피하거나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길 수도 있다. 남성을 우월한 존재로,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성역할이나 성별분업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여성학에서는 이를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차별로 본다. 여성학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도전하면서,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여겨져 왔던 것들에 대해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과거의 통념과 다른 새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는 눈을 가진 것, 그래서 나도 모르게 나를 얽매게 했던 관습이나, 통념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것. 그것이 내게는 여성학이다.
3. 여성학을 하기 전과 후에 달라진 점
1) 여성으로의 자긍심과 내면의 힘
여성학을 공부하고 나서 가장 좋은 것은 여성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내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내면의 힘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늘 흔들리고, 고민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나의 시선, 그리고 내 목소리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좋다. 그리고 남성이 더 이상 유일한 기준이 아니기 때문에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더욱 발견하면서 감탄하면서 살 수 있어서 좋다. 자매애는 강하다 (Sisterhood is strong!)라는 말이 있다. 말이 통하는 멋진 친구들, 멋진 여성들에 대해 마음껏 감탄하고, 여성들과의 유대가 더없이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예를 들어, 기도할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기도했을 때 내게 와 닿지 않았던 내 조상들의 하나님이, 이덕주 교수님의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이라는 책을 읽고, 전삼덕의 하나님, 김세지의 하나님, 박에스더의 하나님으로, 이 땅에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우리 할머니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했을 때 더 강하게 와닿았다.)
2) ‘여성적 이슈’에 대한 새로운 관점
앞서 얘기했듯이 결혼을 하고 시댁에서 첫 명절을 보내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딸로 자라지 않았다. 마치 아들처럼, 계속 공부하고, 일 하고, 가사나 출산 같은 건 나와 상관없을 것처럼 그렇게 자랐다. 점점 자의식이 생기면서 무시하면서 피하고 싶었던 일들이었는데,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출산이나 육아, 가사, 돌봄 같은 소위 ‘여성적’인 일들의 가치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는 엄마의 삶, 할머니의 삶처럼 사회적인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 보잘 것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보석같은 진실을 담고 있는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에 주목하게 되었다. 생산영역에 여성들이 많이 진출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가시적인 성과지만, 그것만으로 여성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지는 않는다. 재생산 영역에서의 여성들이 하고 있던 일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평가하고, 혹 그것이 여성들에게만 과도하게 부과된 짐이었다면 함께 지는 것. 그래야만 정의롭고, 진정한 변화가 올 수 있다. 그리고 여성이 여성의 삶에 대해 평가해주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3) 다양성에 대한 새로운 시선
기독교에서 오롯이 자란 나의 삶을 보면 교회에서 순종, 헌신, 믿음은 잘 가르쳐줬는지 몰라도 다양성에 대해서는 잘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여성학자들은 연구자들이 표준적이고 남성중심적인 개념 틀에서 벗어나야 일상적 여성의 경험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인식하는 사람이 서구인인가 비서구인인가, 여성인가 남성인가, 장애인인가 비장애인인가, 이성애자인가 동성애자인가, 상류층인가 하류층인가에 따라서 동일한 현상도 다르게 해석된다. 예를 들어 남성의 입장에서는 집은 사적인 휴식공간이지만, 전업주부에게 집은 ‘일터’가 된다. 또한 백인여성에게 가정은 억압과 노동의 공간일 수 있지만, 사회적인 차별이 심한 흑인여성에게 가정은 따뜻한 안식처이기도 하다.
‘단 하나의 객관적 사실’이 있다는 믿음은 주류가 아닌 사람들의 다양한 해석을 가리고 의미를 지워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누구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이 사실인가?’를 질문해야 한다. 이러한 질문들은 그동안 보편적인 상식으로 알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어떤 특정한 입장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드러낸다. 보편이라는 신화가 깨지고, 더 많은 다양한 사실들이 등장할 때, 우리는 세상에 대해 조금은 덜 왜곡된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여성학은 남성중심의 관점을 상대화하며, 그동안 배제되어왔던 사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새로운 질문체계다(이재경 외, 2007).
4) 삶이 복잡, 그러나 더 깊이
이렇게 얘기하면 여성학을 공부하는 동안 매우 재밌고, 기쁘고, 행복했을 것 같은데 꼭 그렇지 않았다. 내가 무지로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여성학자 정희진(1995)의 말처럼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거나 편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다른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 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이를테면 대안적 행복, 즐거움 같은 것이다.
지배가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을 상상해보라. 여자와 남자가 아주 똑같고, 기계적으로 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상호 배려의 비전이 우리의 관계를 틀 지우는 기풍이 되는 세상에서 사는 것을 상상해보라. 우리 모두가 그냥 우리 자신으로 살 수 있는 세상. 평화와 가능성의 세계에서 사는 것을 상상해보라. 페미니즘 혁명만으로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인종주의, 학벌주의, 제국주의 역사도 종식시켜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완전하게 자기를 실현하는 여자와 남자가 된다면, 사랑이 충만한 공동체를 만들어 더불어 살면서 자유와 정의의 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현실에서 성취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더 가까이 오라. 페미니즘이 당신의 삶과 우리 모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살펴보라. 더 가까이 오라. 와서 페미니즘 운동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 직접 살펴보라. 더 가까이 오라. 그러면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임을. 벨 훅스(2002). 행복한 페미니즘. Feminism is for Everybody 중에서.
추천 영화 & 도서
<영화>
- 컬러퍼플(1986) The Color Purple
- 안토니아스 라인(1995) Antonia's Line
-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2009)
- 매년 4월에 열리는 서울 국제여성영화제 상영 영화들